SV     GREECE

최종수정일 2002년 01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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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  <Greece>

 유럽 남동부 발칸반도의 남단에 있는 나라. 정식명칭은 헬레니공화국(Hellenic Republic). 반도의 본토와 그 주변에 산재하는 섬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본토의 서안은 이오니아해(海), 동안과 북동안은 에게해에 둘러싸여 있다. 북쪽은 연장 800 km에 이르는 긴 국경에 의해서 알바니아(ZA)·마케도니아(Z3)·불가리아(LZ)에 접하고, 동쪽은 마리차강(江)을 사이에 두고 터키(TA)에 접한다. 그리스는 유럽 문화의 발상지로서 BC 500년경부터 약 1,000년 동안 지중해에서 발전하여 아테네를 중심으로 하는 그리스 문화가 번영하였다. 그 후 로마·비잔틴·오스만투르크제국의 지배하에 놓였다가 19세기 초에 오스만투르크로부터 독립하여 펠로폰네소스반도와 키클라데스제도를 중심으로 성립된 현재의 그리스가 탄생했다. 1910년대부터 20년대 초에 걸쳐 발칸 전쟁으로부터 그리스-투르크 전쟁에 이르는 동안에 거의 현재와 같은 영토가 그리스의 국토로 되었다. 고대에 문화의 꽃을 피웠던 그리스는 근대 서유럽문명에 있어서 그 근원지를 이루었다. 즉, 물질문명과 정신문화의 많은 측면에서 서유럽은 다양한 경로를 거쳐 고대 그리스 문명의 유산을 계승해 왔으며, 현대의 그리스는 그 지중해역에 속하는 자연경관과, 문명의 요람지로서 많은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다. 그런데도 현대 그리스는 유럽의 저소득국가이며 전쟁과 내란을 거듭해 온 후진국으로 간주되고 있다. 또한 독립 후에도 정국이 불안정하고 경제발전도 부진한 상태에 있다.

【역사】 그리스에 대한 투르크 제국의 지배는 그리스의 민족성을 변질시킬 정도로 혹독한 것이었다. 유능한 그리스인은 살해되든지, 망명 또는 개종하였고 여성이나 어린이들은 노예로 팔렸으며 농민은 토지를 투르크인 영주에게 빼앗기고 그 농노가 되었다. 그리스도교도에게는 인두세가 부과되어 국고의 중요한 재원이 되었고, 그 징세책(徵稅策)의 일환으로 그리스정교회의 존속이 겨우 허락되었다. 다만 투르크인이 능숙하지 못했던 상업분야에서만은 그리스인이 활동할 수 있게 됨으로써, 18세기 이후 베네치아의 쇠퇴에 대신하여 그리스의 상인들은 흑해·지중해에서 활약하게 되어 마침내 강력한 선박대(船舶隊)와 막대한 돈을 벌어들여 후의 독립전쟁에 큰 지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17세기 후반에 군사력이 쇠퇴한 투르크는 열강과의 외교교섭이 필요하게 되자, 그리스인이 통역관으로 등용되게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그리스인은 점차 외교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나아가 발라키아·몰다비아 등의 통치에도 참여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파나리옷(Fanariot)’이라는 그리스인의 특권계급이 형성되었다. 또한 산악지대에는 결사적으로 투르크 지배에 반대하는 그리스인들이 ‘클레프트(Kleft)’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었으며, 클레프트의 세력에 대비하여 ‘아르마톨(Armatol)’이라는 그리스인 경찰대가 각지에 조직되었으며, 클레프트는 후에 그리스 독립운동의 주요세력이 되었다. 18∼19세기의 러시아-투르크 전쟁, 프랑스 혁명, 알리파샤 술탄의 반란 등은 그리스 독립운동을 자극하였으며, 1770년 펠로폰네소스 반란의 실패 후, 1821년 남부 러시아의 오데사에서 비밀결사가 탄생했다. 이 애국적 비밀결사 ‘필리키 에타레이아(Philiki Etareia)’는 그 지도자 P.A.입실란티스의 지휘로 루마니아의 베사라비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곧 진압되었으나, 이에 호응하여 일어난 펠레폰네소스의 반란이 파트라스의 대주교 게르마노스의 지도로 클레프트·아르마톨이 합세하여 성공을 거두자, 그리스의 독립전쟁(1821∼29)으로 발전했다. 독립군은 D.입실란티스의 지휘로 각지에서 투르크군을 구축하였으며, 그리스 선대(船隊)도 이에 참가하여 투르크 함대에 타격을 주었다. 드디어 22년 1월 그리스 독립이 선언되고, 파나리옷의 마브로코르다토스(1791∼1865)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클레프트파와의 내분이 일어났다. 투르크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키오스섬 콘스탄티노플을 비롯한 기타 지역에서 그리스인을 대량 학살하였다. 그리스인 학살을 계기로 유럽의 여론은 압도적으로 그리스 편을 들게 되어, 시인 L.바이런을 비롯해서 사재(私財)를 털어 의용군에 참가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으나, 유럽의 여러 군주들은 메테르니히의 압력으로 독립운동을 묵살하려는 태도를 취하게 되었고, 다만 영국만이 캐닝 외상을 중심으로 그리스를 교전국(交戰國)으로 인정하고 23년 군사·경제 원조를 제공하였다. 한편 투르크는 이집트에게 구원을 청하여, 24년 정예를 자랑하는 이브라힘파샤군(軍)이 펠로폰네소스에 상륙해서 점령을 시작한 결과 미솔롱기는 1년 간의 항전 끝에 결국 26년 4월 함락되었고, 뒤이어 아테네도 포위되었다. 이에 영국은 러시아·프랑스를 동원하여 27년 7월 런던조약을 체결하여 조정하고, 3국의 함대를 파견하여 투르크·이집트 함대를 격파하였다. 이어 28년 4월 러시아가 투르크에 선전(宣戰)하고, 프랑스도 펠로폰네소스에 파병하였다. 그리스의 독립은 29년 아드리아노플 화약(和約), 30년 런던회의에서 보장되었다. 그 동안에 그리스의 내분도 진정되고, 전(前) 러시아 외상 카포디스트리아스가 대통령이 되었으나 암살되었고, 바이에른 출신의 오토 1세(재위 1832∼62)가 국왕으로 옹립되었다. 그리스는 원래 천연자원이 빈약하고 독립전쟁에 의한 피폐가 심했기 때문에, 정치체제를 확립하고 경제강화를 도모하는 것이 오토 1세의 과업이었다. 그는 수도를 아테네로 옮기고, 경제의 확립과 국토의 확장정책에 진력했다. 국토확장의 최종목표는 1453년 이전의 비잔틴 제국을 재건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을 ‘대그리스주의’라고 하였다. 즉 독립 후의 그리스사(史)는 밖으로는 국토확장책, 안으로는 왕당파와 공화파의 분쟁, 그 2가지가 복잡하게 서로 얽혀 온 역사였다고 할 수 있다. 독립 당시의 그리스의 영역은 펠로폰네소스반도와 아르타만(灣)·볼로스만을 연결하는 선 이남에 위치하는 본토와 키클라데스제도에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19세기 후반 이후에는 구(舊) 비잔틴 제국의 실지(失地) 회복을 목표로 하는 영토확장운동이 특히 활발히 진행되어 독립 당시 4만 9000 km2였던 국토면적이 1907년에는 6만 4000 km2에 이르렀다. 1854∼56년 크림전쟁이 발발하였고, 59년의 이탈리아 혁명에 자극되어 61년 그리스에서도 혁명이 일어나 오토 1세가 추방되었고, 덴마크 왕자 게오르그 1세(재위 1863∼1913)가 옹립되었다. 영국은 이때 오랫동안 점령하고 있었던 이오니아제도를 그리스에게 넘겨주었다. 1877∼78년의 러시아-투르크 전쟁 후 베를린 회의에서 그리스의 국경이 개정되었다. 1909년 청년사관들의 ‘군인동맹’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게 된 후, 베니젤로스가 수상이 되어 그리스의 근대화와 대그리스주의의 실현을 목표로 정치를 지도하였으며, 발칸동맹을 결성했다. 1912년과 1913년 2회에 걸친 발칸전쟁 때에는 세르비아·불가리아 등과 함께 투르크와 싸워 더욱 영토를 확대하여 마케도니아 남반(南半), 테살로니케 등을 획득하였고, 에피로스 지방의 남쪽, 크레타섬, 트라케 서부 등지를 영토로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13년 게오르그 왕이 테살로니케에서 암살되어, 그의 아들 콘스탄티노스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발칸전쟁은 이미 제1차 세계대전의 위기를 품고 있었으며, 14년 드디어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이때 독일의 빌헬름 2세의 사촌인 콘스탄티노스 왕은 중립을 희망했으나, 베니젤로스는 삼국협상 편에 서야 된다고 주장하여 서로 반목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영국과 프랑스는 압력을 가하여 왕을 퇴위시키고,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를 왕위에 올려놓음으로써 그리스는 독일에 선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전승국이 된 그리스는 영국의 지지를 얻어 19년 5월 소아시아의 이즈미르(스미르나)에 군대를 상륙시켰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투르크는 극도의 혼란상태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마침내 대그리스주의는 실현될 듯이 보였다. 그러나 케말 아타튀르크(케말파샤)가 출현하여 ‘터키’를 재건했기 때문에 실현될 수 없었고, 22년 그리스군은 소아시아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그보다 앞서 20년 11월의 선거 결과 베니젤로스는 실각하게 되었고, 콘스탄티노스 왕이 다시 왕위에 올랐다. 대그리스주의를 성취할 수 없게 된 그리스는 그 후 터키와의 분쟁을 피하기 위해 이즈미르와 트라케 동부 등을 포기하고 터키와의 인구교환을 도모했다. 그 결과 120만 이상의 그리스인이 터키로부터 돌아오게 되었고, 반대로 45만의 터키인이 터키로 귀환하였다. 그 밖에 10만 가까운 불가리아인이 그리스를 떠났다. 그 결과 그리스의 인구문제는 중요한 과제가 되었고, 아울러 경제문제도 중대한 위기에 직면했다. 화폐가치가 불안정해짐에 따라 24년 3월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국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여전히 왕당파와 공화파의 싸움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1928년 베니젤로스가 다시 수상이 되었고, 35년 혁명이 일어났으나 곧 진정되었다. 왕정이 부활되고 콘스탄티노스의 장남 게오르기오스 2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 후 좌익 공화파가 우세하게 되었으나, 38년 수상이 된 메타사스는 국회를 정지하고 계엄령을 공포했다. 때마침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1940년 10월 이탈리아가 그리스에 선전포고를 했으나 알바니아 전선에서 그리스군에게 패전했다. 그러나 다음해 1월 메타사스 수상이 급서(急逝)하는 등 국내정세가 혼란해지기 시작했으며, 5월에 이르러 그리스는 독일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국왕은 런던으로 망명하였고, 카이로에는 망명 항전조직이 형성되었으며, 국내에서도 지하운동·레지스탕스 조직이 형성되어 게릴라전이 각지에서 빈발했다. 44년 11월 그리스는 해방되었고, 한때 좌우 양파가 협조한 연립정부가 구성되었으나 곧 붕괴되고, 1946년 9월 국민투표의 결과 게오르기오스 2세가 귀국하게 되었다. 그 후 그리스는 격심한 인플레와 좌우 양 파의 내란을 겪게 되었으나, 동유럽에서 유일하게 소련의 위성국이 되지 않은 그리스를 지키기 위해 미국은 십수억 달러에 이르는 거액의 원조로 정부측을 지원했다.

그 결과 좌파는 세력을 잃고 1949년 10월 내란은 일단 진정되었다. 그러나 어려운 경제형편을 배경으로 왕당파·공화파 사이에 정쟁(政爭)이 계속되었고, 군부 쿠데타 등으로 강압적인 군사정권이 성립되는 등 정국불안이 계속되었다. <두산세계대백과사전>  <HL1X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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